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은...작사가가 전하는 언어의 온도
어떤 언어든 언어 그 자체로만 보면 아무런 온도가 없지만, 그 언어가 사람에게 다가가면 그 언어는 기억과 함께 고유한 온기를 불러온다. 김춘수의 꽃처럼 내가 언어를 마주함으로써 언어는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쉼없이 돌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그 언어의 온도를 느낄 여유는 사라진다. 김이나 작사가가 쓴 <보통의 언어들>이란 책은 그간 우리가 잊고 지냈던 언어의 온도를 알게 해주고 메말랐던 감성을 건드려준다.
김이나는 작사가답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을 일상처럼 느껴지지 않게 해준다. 단어가 가진 뜻의 이면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들여다보고 단어에 대한 우리의 단편적인 생각을 바꿀 수 있도록, 다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텍스트에서 감정과 온도를 느끼는 일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 책을 통해 잠시나마 보통의 언어를 곱씹으며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상 깊은 구절과 나의 생각들
공감
'<저녁하늘> 일화를 통해 내가 배운 건, 공감은 오히려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공감은 기억이 아닌 감정에서 나온다. 즉 상황의 싱크로율이 같지 않더라도, 심지어 전혀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디테일한 설명이 사람들의 내밀한 기억을 자극해 같은 종류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공감을 사는 일인 것이다...(중략) 감정의 서랍은 냉장고와 달라서 열고 닫을수록 풍성해진다. 비록 나의 경험치가 아닌 일임에도, 진심으로 내 마음속의 서랍을 열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일은 단순히 맞장구 치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의 기억에 들어가 당시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공감하기 위해선 많은 집중과 노력이 필요하다. 공감하지 못한다면 억지로 '공감하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소통의 방법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의 눈에 억지로 공감하려 하는 내 모습이 진실되지 않아 보일 수 있을테니까.
싫어하다
나는 싫어한다는 감정을 두려움으로 오역한 채 오랜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단순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은 두려워서만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지 않나. 싫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던 것을...(중략)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반드시 정교한 이유가 있는게 아니더라고. 그냥 당신에게 해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냥 그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는거라고.
-> 누군가를 이유없이 피하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처음 그 사람을 알게 됐을 때부터 불쾌하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어쩌다보니 거리가 가까워져서 수년을 같이 보내고 나서 그 감정의 실체를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특정인에 대한 거부감. 그건 '싫어함'이었다. 내가 나의 '선함'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악'이다.
이해가 안 간다
분명한 건 이 문장의 의미를 곱씹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이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을 경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입버릇처럼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표현을 비난조로 사용한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의 "걔는 이해가 안 가"라는 말을 벌거벗기면 결국 그 말은 '걔는 잘못 됐어' 또는 '걔는 이상한 애야'라는 의미더란 말이다. 그걸 느끼고 난 후부터 입버릇처럼 이 말을 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의 비좁은 경험치나 견해를 고백하는 걸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이 목구멍에 걸릴 때, 한번쯤은 삼키고 생각해보려 한다. 이것이 물음표, 즉 의아함인지 아니면 비난의 느낌표인지. 그리고 내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상황이 내가 서 있는 위치, 다시 말해 나의 관점 때문은 아닌지. 이렇게 나의 관점을 의심하면 또 다른 관점으로 어떤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확실히 나의 세계를 확장하거나 견고히 해주었다. 때로는 관용적으로 쓰는 말들은 잘못 쓰인 채로 굳어진 근육 같다.
-> 이 말을 습관적으로 쓰는 사람은 독선적일 확률이 높다. 자기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옳지 않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스스로의 발전을 제한하고 관계에서 자신을 고립시키는 말이다. 혹시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대화에서 이 말을 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겠다.
속이 보인다
명확히 어른만의 언어인 말이 있다. '속이 보인다'는 말이 그렇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나의 촉으로, 또는 나의 경험치로 알 수 있는 것들을 퉁쳐 표현하는 말인데, 아이들에게서 이 말이 잘 쓰이지 안쓰는 건 아이들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기가 막히게 캐치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쉴 새 없이 자기의 단점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급적이면 좋은 걸 더 많이 보는 사람은, 아마도 안에 좋은 게 더 많은 사람일 테다. 인간에게 객관적 시각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나의 좋은 면에 투영시켜 좀 더 나은 세상을 보는 것도 방법이다.
-> 뭐 눈에 뭐만 보인다는 말. 인간은 편향적이고 그래서 세상을 자기투영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면, 누군가의 단점을 잘 발견하는 일이 썩 달가운 일은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뒷담화
나는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부정적 감정이 깃든 일에는 어느 정도의 룰이 있으면 좋다는 주의다. 이를테면 싸울 일이 있을 때에 반드시 피해야 하는 말이나 몇 시간 이상은 절대 잠수 타지 않기 등의 룰이 있으면 좋은 것처럼. 나의 경우 뒷담화를 듣게 될 때 충분히 공감하며 듣되 그 감정을 공유하지는 않겠다는 룰이 있다. 실제로 그 사람에게 불만인 점들은 그의 입장에선 충분히 타당하나 내게는 개인적으로 타격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뒷담화를 실컷 들은 후에, 나의 그 사람에 대한 감정엔 변화가 없음을 공지한다...(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부적절한 것들에는 중독성이 있으며 중독성이 있는 것들은 습관이 된다는 사실이다. 최대한 멀리하되, 부득이 이를 하게 된다면 그에 따른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나쁜 것들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굳이 상기하며 마무리 짓는 것을 내 뒷담화의 룰로 정의해본다.
-> 살면서 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들 중의 하나인 뒷담화. 뒷담화를 안 할 수 없다면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원칙을 정해야한다는 내용이다. 확실히 뒷담화는 중독성이 있고 계속 뒷담화를 하기 위해 그 사람의 좋은 점도 나쁜 점으로 만들어버리게 된다. 결국 중독된 뒷담화는 스스로를 속을 더 자주 볼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다.
미안하다
이 문자를 보내기까지 상대가 받았을 억울함과 분노를 최대한 떠올렸다. 잘못을 한 사람은 석고대죄라도 할 수 있지만, 잘못을 당한 사람은 사과를 받는다 하여도 그 사과가 소화되기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사과는 나의 의지로 할 수 있는 '행위'이지만, 억울함과 분노는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나 긴 답장을 받았다. 말미에는 고개를 들 수가 없게도 사과를 해주어 고맙다는 말도 포함돼 있었다. 나는 내가 잘못을 저지른 상대가 좋은 사람이어서 다행이라는 비겁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또 한 번 사무치게 미안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걸로 '미안하다'는 내용의 문자로 다 갚지 못한 죄책감을 갚아나가기로 했다. 후련한 마음과 속 편한 기분이 눈치 없이 밀려와도 애써 밀어내기로 다짐했다. 사과를 받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걸로 갚아 나가기로 한다. 그 사람은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니까.
-> 진정으로 사과하는 법에 대하여 알려준다. 사과를 하기 전부터 상대방이 받아주는 것을 전제로 하지말자. 사과는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고, 상대방이 용서를 할지말지는 상대방의 의사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상대방이 느꼈을 불편함과 분노 등을 먼저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결국 우리는 의도치 않게 평생을 누군가에게 잘못을 하며 살아갈 테니까.
상처
배려라는 것은 어쩌면 피냄새를 맡을 줄 아는 감각이다. 마음 여기저기에 움츠러든 자국이 많은 사람들은 서로를 소리 없이 반긴다. 낯가리는 이들이 서로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 사소하고 고요한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왁자지껄한 회식자리나 MT 같은 곳에서 겉도는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조용히 다가가 앉는 풍경. 또는 발표를 망쳐서 붉어진 얼굴의 동료에게 가볍게 농담을 던지거나 기운을 북돋아주는 일. 시간으로 잴 수 도 없는 찰나겠지만, 그 안에서는 거대한 두 개의 우주가 만든다.
-> 상처와 배려, 공감은 다른 단어이지만 맞닿아 있다. 누군가의 상처를 보고 다가가는 일은 자신의 상처를 기억해내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다가가는 따듯한 일이다.
염치가 있다
남녀노소를 떠나 내가 좋아하는 부류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염치'의 유무다.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하는 단어다. 나이가 들어가며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염치'다.
비하의 뉘앙스로 '아저씨', '아줌마' 소리를 듣는 일은 대개 염치와 관련이 있다. 대로변에서 어금니까지 내놓고 이쑤시개를 쓰는 모습, 지하철에서 쩍벌다리를 하고 앉은 모습, 빈자리를 향해 사람들을 거칠게 밀쳐내며 돌진하는 모습 등등은 모두 본인의 편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태도들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이런 태도를 가진 자들이야 답이 없다쳐도, 나이와 밀접한 상관이 있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서글프다. 삶에 지쳐, 육아와 회사에 지쳐, 체면이란 게 사치인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태도일 테니 말이다. 수줍음이 있는 어르신이 된다는 건 그래서 어렵다. 그래서 소망한다. 시간이 흘러도 나 또한 염치 있는사람으로 남아 있길.
-> 모든 문장에 공감이 가 그대로 옮겼다. 나이가 들수록 품위를 지키는 게 중요한데 왜 나이가 든사람일수록 품위를 찾아보는게 어렵나. 저 볼드처리한 문장에 답이 있었다. 언제나 기억해야할 킹스맨 명대사 Manners maketh man.
품위를 지키는 법: 욕하지 않기. 목소리를 대화하는 상대방에게 잘 들릴 정도로만 크게 하기. TMI하지 않기.
마음을 방치하지 말아달란 혼잣말
두드러기만 나면 다행이지만, 문제는 이러다 보면 나중엔 힘들 때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방법조차 모르는 어른이 된다는 거다. 행위는 정신을 지배하기에, 눈물을 참는게 습관이 되면 나 스스로 '나는 지금 힘든 게 아니다'라고 속이는 것도 가능해진다. 마음은 그렇게 방치되고, 어느 날 그러다 완전히 고장나버렸을 때 '대체 왜 이런지 모르겠다'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허다핟. 이런 경우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던 본인에게 그 이유가 있을 확률이 높다. 나를 들여다보고 챙긴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렁그렁 맺히는 눈시울도 내 몸이 내가 들어줬으면 하고 중얼대는 혼잣말이고, 펑펑 쏟아져 나오는 오열은 내가 내게 살려달라고 외치는 울부짖음이다.
성숙
칭찬에는 중독성이 있다. 어른도 그런 마당에 아이들에겐 오죽하겠는가. 이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는 점점 '성숙한' 테두리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 중년 즈음이 되어 사춘기 같은 이상한 정신적 방황을 겪는 이들은 대체로 말썽과는 거리가 먼 '성숙한 애어른'이었던 경우를 많이 보았다. 말썽은 아이가 내 뜻대로 굴지 않는 상황을 두고 쓰는 어른 입장에서의 표현이지, 아이에게는 일종의 갈등이다. 나의 의지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감에 대한 저항, 그리고 혼돈의 표현인 것이다.
'애어른'이 자라 '어른애'가 된다.
-> 어른의 편의주의적인 칭찬이 아이를 망친다. 아이에게 성숙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다. '성숙'은 아이가 정상적으로 지나가야할 성장과정의 생략을 의미하거나 그것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말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나이 든다는 것
"나이가 들면서 귀가 잘 안들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나는 잘 들리지 않아서 평화롭기도 하다."
처음 들었을 땐, 그런말이 어디 있냐고, 아픈 마음을 숨기고 화를 냈지만 이 말은 내게 아직도 각인이 돼 있다. 어쩌면 그때까지도 나이 듦에 대한 나의 주 감정은 혐오나 공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뒤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파도를 타듯 자연스러울 때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육체가 약해지는 데에는 분명, 조금 더 신중해지고 조금 더내려놓으라는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부터였다. 또 매사에 속도가 조금 늦어지고 일분, 일초를 읽는 감각이 둔해짐으로써 세상을 좀 더 큰 그림으로 읽을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것도, 어쩌면 신체의 노화 덕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중력이 내게 해주고픈 말을 받아들이면서 다만 너무 아프지 않게 나이 드는 것, 그러나 숫자로 모든 걸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 육체의 유한함 앞에 겸허해지는 것, 이것이 앞으로의 내 나이에 관한 바람이다.
-> 누구나 나이가 들고 유한한 삶은 끝이 난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이 금새 다가 오듯이 인정하기 싫어도 우리는 늙게 된다. '늙음'을 비난하는 말들을 한다면, 부메랑처럼 그 말들은 시간이 지난 후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시간 동안 삶을 꽃피워나가지 못한 것은 잘못이다.
꿈
꿈은 어딘가에서 날아온 꽃씨처럼 소리, 소문없이 피어났을 때 비로소 꿈이다.
-> 꿈은 유년기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에나 조용히 찾아 올 수 있으니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체성
우리는 각자 고유한 나임에 틀림없지만, 세포분열을 하듯 수많은 상황 속에 각기 다른 '역할'로도 존재한다. 이 역할은 꼭 의무감만이 아닌 무의식으로도 생겨나는데,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면 그때의 모습으로, 직장 동료 모임에선 그 무리에 맞는 모습으로 있게 되는 상황이 이를 증명한다. 심지어 꼭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누구의 앞이냐에 따라 우리는 조금씩 다른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기 힘들다.
이 모습들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면 외로운 밤이 찾아온다. '왜 내 맘을 아무도 모르지? 왜 나는 강한 사람인 줄로만 알지?' 그건 누구 탓도 아닌 우리의 '사회성' 때문인데 말이다. 정세운의 말을 잘못 이해하면 진정성이 없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렇다면 큰 오산이다. 모두에게, 모든 곳에서 온전한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주 이기적이어야 가능하다. 배려하기에, 사랑하기에, 책임이 있기에, 히스토리가 있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 모습을 한다.
-> 누구나 스스로에게 원하는 모습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할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 때 이 말을 왜 못했지?' 라고 생각하며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황과 특정 관계에서 그러지 못할 때 또는 그러지 말아야할 때는 존재한다.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회성'과 그 사람과 나 사이에서 생겨난 나의 또 다른 자아가 그걸 막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한계에 부딪히다
한계는 '관리자급'이 되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팀장이 되고 팀원이 생기면서, 일을 분배하고 인력을 적재에 배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내 손에서 끝나는, 나 하나만 잘하면 되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쉬웠다. 지시한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패닉이 오고 결국 팀원들은 할 일이 없고 나만 일을 떠아는 경우가 허다했다...(중략) 그러나 그럼으로써 '나 혼자 잘하면 되는 일'의 소중함을 느끼고 작은 부분의 디테일을 잘 보는 나의 장점을 살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될 떄까지 해보는 노력 끝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해보고 또 해보다 결국 인정하게 되는 쓸쓸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어떤 부분에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의 '벽'에서 뒤돌아봐야 알 수 있는 나만의 가능성이 있다. 즉 한계에 부딪힌다는 건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도 된다. 그러하기에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이 말은, 스스로는 깨닫기 힘든 부분이 잠재력 그리고 가능성이라는 뜻도 된다. 땅 끝에 닿아본 사람만이 지도를 그려낼 수 있듯, 한계치에 닿아본 사람만이 스스로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
->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한계에 부딪히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알아간다. 자신의 부족한 역량과 단점을 마주하고 겸손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의 또 다른 말은 성장이다. 한계점까지 왔다면 그 다음 한걸음이 의미하는 바는 곧 성장이다.
겁이 많다
겁이 많다는 건 단순히 벌레나 귀신을 무서워하는 그런 것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겁이 많은 자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다. 또 자신과 얽힌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신중함이 있는 자들이다. 수비에 총력을 다하는 축구팀의 경기가 지루할지언정, 그들은 결국 강하다. 삶에 있어 충동보다는 지구력으로 대처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나는 겁이 많은 편이야'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호감이다. '겁이 없음'을 매력적인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늘 강했다.
-> 겁이 많다는 것의 반대말로 용감하다를 떠올리기 쉬우나, '무모하다'도 그 반대가 될 수 있다. 얻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고, 겁은 무엇을 잃지 않게 해주는 수단이다.
★살아남다
나를 살아남게 해준 순간들이 있다. 좋은 가사를 써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고뇌하는 순간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가사가 잘 나오지 않을 때, 슬럼프가 찾아올 때, 밀려 나가지 않으려 버틸 때 등의 초라한 시간들이 내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를 결정해주었다. 가사가 잘 나올 때에는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중략).. 문제는 내가 본 어느 누구도 이런 컨디션이 늘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는 '감'이라는 것이 떨어지면,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속수무책이 된다...(중략) 나이가 들면서 내 언어의 나이듦을 인정하던 순간은 유쾌하지 않았다. 자괴감에 빠졌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돌아보면 쉬운 일이지만, 닥치면 어려웠떤 모든 일들은 이 '인정'이었다. 나의 한계를 느꼈을 때, 더이상 힘으로 밀어내는 건 객기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중략)
그리고 되도록이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음악도 결국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일은 너무 잘하는데 인성 이슈가 있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낙오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중략)게다가 자신감이란 건 가지를 종종 쳐주지 않으면 오만이 되기 십상인데, 이 밸런스를 잡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중략) 괜찮은 인간이 되고픈 마음 한편에 생존본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는 자존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중략)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클라이언트랑만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굼 하나가 아쉬운 커리어일 땐 더더욱.
15년 전쯤 업계의 중심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다른 파트의 일들을 이해하기에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고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들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또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자존감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아우라를 갖고들 있다...(중략)감은 영원하지도 않지만 한 번 왔다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시 한 번 돌아왔을 때 그것을 펼칠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그리고 그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내 지난날들에 비굴하고 비참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시선도 많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빛나는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
기억하자. 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 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 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다는 걸.
-> 우리가 많이 들어본 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거야.' 그 말에 함축된 과정과 의미,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가져야 하는 자세를 알 수 있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능력있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더 복합적이고 위대한 말이다.
창작하다(체력이 필요한 이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뇌라는 것은 결국 몸뚱이의 일부이니 피가 쌩쌩 돌고 산소가 공급되어야 원활히 돌아갈 터이고, 튼튼한 몸이 받쳐주는 지구력으로 버티는 시간이 있어야 '영감'이란 게 오더라도 잡을 기력이 있는 것이다.
영감뿐이랴. 새로운 걸 시작하고 싶은 의지, 힘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근성 새로운 기회가 오기까지 잠복하고 버티는 힘... 모두 결국 체력에서 나온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게 많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다루느냐에 따라 내일의 질이 달라질 뿐이다.
쳇바퀴
인간은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동시에, 그 안정이 오면 회의감을 느낀다. 나는 내심 쳇바퀴같이 돌아가는 스케줄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내가 어딘가 잘못된 것만 같아서 이런 말을 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 다채로워 보일 수 있지만, 내 일상은 요일별로 정확히 정해진 루틴으로 반복된 지 오래다. 물론 육체적인 피로도 때문에 이 쳇바퀴가 문득문득 숨이 막힐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건 언젠가 깨달은 이 생각이다. '나는 이 쳇바퀴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았다.' 예측 불허의 내일들이 펼쳐져 있는 시간은 막상 그곳에 있을 때는 주로 암담하다. 아마도 이건 내가 모험가 유형이 아닌 성향 탓도 있겠지만, 불안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알 수 없는 내일 때문 아니겠는가. 그러니 내가 별난 건 아닐 것 같다. 단지 '쳇바퀴'라는 단어가 가진 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특별한 하루라는 것은 평범한 하루들 틈에서 반짝 존재할 때 비로소 특별하다. 매일이 특별할 수는 없다. 거대하게 굴러가는 쳇바퀴 속에 있어야지만, 잠시 그곳을 벗어날 때의 짜릿함도 누릴 수 있다. 마치 월요일 없이 기다려지는 금요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주식의 수익률과 동일한 수익률을 보장하는 예금이 있다면, 주식에 투자할 것인가 예금을 넣을 것인가? 당연히 예금이다. 쳇바퀴같은 삶을 우리는 지루하는 이유로 너무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순적이게도 행복은 불행이 있어야 존재하는 말이다.
기특하다(자신감과 자존감의 차이)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자존심이 꺾이지 않으려 버티는 막대기 같은 거라면, 자존감은 꺾이지 말고부터 자유로운 유연한 무엇이다. 자존심은 지켜지고 말고의 주체가 외부에 있지만 자존감은 철저히 내부에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순간은 자존감 통장에 차곡차곡 쌓인다. 선행에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욕망이 부록처럼 딸려온다. 어릴 때 칭찬에 길들여졌을 수많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내성이고, 특별히 나쁠 것도 없는 점이기도 하다. 허나 선행이 누군가의 칭찬과 거래되는 순간 자존감 통장에는 쌓일 것이 없다. 나의 대견함을 '알아주는' 주체를 타인에게 넘겨버릇하는 게 위험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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